2022. 2. 19.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서 정장은 교복과 동치였다. 그 시절 입던 교복이란 것은 옷의 용도 외적으로 장점이 있긴 하나, 용도에 한정지어 생각해 보면 기본적으로 헐렁해 맵시가 나지 않는데다 불편하기까지 했다. 이런 경험 때문에 교복과 정장을 모두 싫어했지만 지금은 몸에 맞는 정장은 꽤 멋진 옷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정장은 경조사가 아니면 굳이 입을 마음이 들지 않아 거의 모든 옷을 자취방으로 가져온 지금에도 아직 본가에 보관 중이다. 오늘이 바로 그 경조사라는 게 있는 날이라 어제 본가로 되돌아왔다. J의 결혼식 날이다.
정장을 취업 면접을 보기 위해 산 직후 아버지께 넥타이 매는 법을 배웠지만 내가 매면 아무래도 모양이 예쁘게 안 나왔다. 그래서 이후로도 몇 년간은 매번 아버지께 부탁했는데, 이젠 두세 번 시도하면 이상하지는 않을 정도로 맬 수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매는 게 전부라도 손이 기억하긴 하나 보다.
날이 쌀쌀해서 양복 위에 처음으로 정장 외투 대신 파카를 입고 나왔다. 친한 친구의 결혼식인 만큼 식장에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다. S가 축의금을 받고 있었고 초등학생 때부터 여태껏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 로비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름은 알지만 어색한 친구들도 보여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그래도 옛날에 친했었다는 기억이 있으므로 술자리라도 한 번 가진다면 다시 친해지기는 쉬울 것 같지만 팬데믹 이후로는 그조차 어렵다는 게 아쉬웠다. 당장 이 결혼식 식사 자리도 모두 모여앉기 힘든 세상이다.
신랑 신부가 입장하면서 예전에 J와 녹음했던 이승기의 『나랑 결혼해줄래』가 배경에 깔리고 신랑의 영상 편지가 재생되었다. 그 때 처음으로 녹음실 체험을 했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고 다시 그럴 일이 생기면 기꺼이 하겠지만 막상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토익 스피킹 시험을 볼 때도 난 내 목소리가 제대로 녹음되었는지 다 듣지 못하고 시험장을 나갔으니까.
2절부터는 J가 직접 노래를 하고 내가 잠깐 앞에 나와 랩을 했다. 코로나로 인해 기침이 심하게 났을 땐 불참할까도 생각했었는데, 식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는 상태가 나아져 다행이었다. 내가 퇴장하자 J가 율동(본인 말로는 “생쇼”)를 하기 시작했다. 멋지다기보다 재밌었고 분위기를 띄우는 데는 성공했다.
주례는 J가 어렸을 때부터 인연이 깊던 G교회 목사님이 진행해 주셨다. 결혼 당사자들은 우리 세대가 대부분 그렇듯 종교색이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다. 집안도 기독교와 불교로 서로 달라 J는 이 주례가 없었으면 했지만 부모님의 강력한 요구로 “종교색을 많이 넣지 않는" 선에서 타협을 봤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막상 들어보니 기도문까지 풀코스로 포함된 기독교 그 자체인 주례인데다 너무 길어서 지루했다.
결혼식에 참석하면 한 결혼식이 끝나고 식장에서 다음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이 유난히 눈에 띌 때가 있었다. 화려하게 줄지어 있던 화환들이 재활용을 위해 수거되고 다음 화환이 놓이고, 축의금 내는 곳에 앉아있는 사람이 바뀌고, 식장 곳곳에 적혀 있던 이름이 바뀐다. 곧 사람만 바뀐 거의 비슷한 식이 진행된다. 그럴때면 식장이 일종의 결혼 컨베이어 벨트같이 느껴져 묘하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로 그 사람의 결혼식을 폄하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오늘은 다행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구체적으론 잘 모르겠지만 결혼식에 몇 번 참석해 본 경험에 의하면 당사자들은 보통 매우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친한 친구들일수록 오히려 잘 챙기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걸 이해해 주고 더 중요한 일, 이를테면 덜 친한 어르신들을 챙기는 일에 집중하라고 빨리 보내주는 것이 우리 친한 친구들의 역할이라 믿는다.
뷔페 음식은 J의 호언장담에 비하면 평범했다. 이제 몇 접시 먹지도 못하겠다. 식사 중 밖을 보니 눈이 펑펑 오고 있었다. 경찰인 S는 교통사고가 늘어난다고 싫어했지만 눈을 좋아하는 나는 ‘기쁜 날에 걸맞는 날씨구나’ 하고 혼자 생각할 뿐이다.
식장을 나와 남은 친구들끼리 바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보드게임카페를 갔다. 양복입은 아저씨들이 우르르 모여 보드게임이라니 재미있는 광경이다. 떠올려보면 2년 전 J`의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도 우리는 이랬다. 정말 한결같은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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