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
오늘 일찍 일어났다면 등산을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주중에 새벽까지 일한 때문인지 좀처럼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 9:30에 전화가 왔지만 갈라지는 내 목소리를 들으시더니 더 자라는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더 이상 잘 수 없을 때까지 자는 것이 적정 수면 시간이다”라는 언젠가 봤던 말을 충실히 따라 12시가 넘어서 일어났지만 별로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입안 구석구석이 헐어 아픈 게 느껴졌다.
등산을 포기하더라도 할 일은 많다. 주중에는 좀처럼 시간을 길게 낼 수 없으니까 주말을 충실하게 보내야 한다. 우선 오징어덮밥으로 식사를 때우고 간당간당한 야채를 손질해 얼렸다. 그리고 아버지 공장에 새로 들여놓을 컴퓨터를 만들어야 했다. 지금 쓰는 컴퓨터의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인데, 금속을 가공하면서 튄 절삭유 방울이 공기 중을 날아다니다 컴퓨터 내부로 들어가 기판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환경이라 여태 버틴 것이 용하다.
암호화폐라는 범세계적인 전력 낭비 행위로 그래픽카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이후 컴퓨터 조립에서 손을 뗐는데 그동안 크게 바뀐 건 없어 무난하게 구성을 마쳤다. 캐드 정도 돌리는 사무용 컴퓨터지만 어차피 내 돈이 아니라서 약간은 오버스펙이 된 감이 있다. 생각보다 케이스 고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강화유리니 LED니 하는 쓸데없는 것 없이 작고 구멍이 적고 깔끔하게 생긴 케이스는 그다지 많지 않다.
주문을 위해 회사 주소를 알려달라고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밭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런데 통화 중 예상 못한 말을 들었다. 아버지 거래처 아는 분의 딸과 한 번 만나보라는, 나도 30이 넘었는데 여자 한 번 만나봐야 한다는. 내 동의도 안 얻고 전화번호를 알려줄 수는 없어서 물어보는 거라 말씀은 하셨다만 이건 솔직히 말해서 통보다. 당황해서 한숨만 쉬다 제대로 거절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거절했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 같지만.
조금 멍하니 있다 오늘 하기로 했던 일 중 하나인 보드게임용 미니피규어 도색을 시작했다. 하지만 컨디션도 별로 좋지 않은 데다 아까의 통화 때문에 집중도 안 되고 의욕도 생기지 않아 밑색만 깔짝깔짝 칠하다 포기하고 정리했다.
나라고 연애나 결혼에 대한 생각을 왜 안 해 봤겠는가. 감사하게도 실제로 진지한 교제를 제안한 분도 계셨는데 말이다. 장단점은 충분히 따져 봤다.
친구들이 점차 짝을 찾으면서, 같이 여행을 다니고 공연을 보고 음식을 먹으러 다닐 수 있는 친구들이 사라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계속 즐기기를 원한다면 나 또한 결혼이라도 해서 고정 파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트레이드오프가 있다. 내 수많은 취미,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 생활방식 등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이 모든 자원이 아직은 내게 소중하다. 남과 깊은 관계를 맺어 그 사람의 개인사에 말려들거나 기분에 공감해주는 것, 로맨스를 즐기는 것 또한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다.
이런 나와 딱 맞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지만 있을 리 없으며 굳이 그런 수고를 하면서까지 결혼할 이유도 없다. 결혼 생각도 없으면서 나와 비슷한 나이—결혼 적령기—의 상대를 만나는 것도 그 사람에게는 시간낭비가 될 뿐이다.
종합하면 내게 필요한 것은 그냥 친구라는 결론이 나온다.
부모님께나 친구들에게는 이런 생각을 말하진 않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구구절절 진지한 얘기나 상담을 하는 취향은 아니다.
딱히 한 게 없이 밤이 되어 오랜만에 피아노를 좀 연습하고 큐브 맞추는 법을 복기했다.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일기를 쓰다 보니 지금의 기분과 맞물려 언젠가 밤에 차를 빌려 혼자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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