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5.
원래 오늘은 3인이서 합주를 할 예정이었지만 J의 사정으로 다음 주로 미뤄졌다. 합주도 오랜만인데다 서울로 이사오고 나선 시간상 피아노 학원도 다니지 못하고 있어 제대로 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미뤄져서 오히려 연습할 시간을 벌었다.
그렇게 일요일 시간이 빈 김에 등산을 가기로 했다. 링피트 1회차 클리어 이후 전혀 운동을 하고 있지 않아 몸을 좀 움직여야겠다는 의무감이 슬슬 들기도 했고 전에 산 예쁜 등산화도 다시 신어보고 싶었다. 갑자기 정한 거라 친구들은 굳이 부르지 않았다. 옛날엔 당일 약속을 잡고 모여서 영화를 보거나 술을 먹거나 찜질방을 가기도 했었는데 그럴 수 있는 것도 다들 가까이 살고 시간도 많은 학생 때 뿐이겠지.
아침은 시리얼에 건조 딸기를 넣어 간단히 먹고 회사에서 준 배낭에 물과 초코바, 레몬 사탕 등을 챙겨 관악산으로 향했다. 사당역이 등산로 입구가 가까워서 이곳에서 출발해 능선을 타는 코스를 따라가기로 했다. 내게 길치 속성은 없었을 텐데, 관음사 앞에서 길을 잘못 들어 막다른 길로 가는 바람에 다시 되돌아와야 했다.
등산은 어르신들 취미라는 느낌이 있지만 나보다 어린 사람도 많이들 오는 모양이다. 신기하게도 단체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운동복이 없어 적당한 티셔츠에 헐렁한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그 사람들 복장을 보니 적어도 운동용 바지 정도는 하나 마련하고 싶어졌다. 중간중간 위치한 군사용 벙커나 헬기 착륙장을 보면서 초등학생 때 아버지를 따라 관악산을 올랐던 생각을 했다.
그러고보면 혼자 등산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어렸을 땐 주로 부모님과 소래산, 관악산, 마니산, 도봉산 등을 갔었고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이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은 동생도 같이 갔었는데, 힘들어서 중간에 내려가겠다고 하는 것을 컵라면으로 꼬셔 결국 정상을 찍었다. 동생은 그 이후로 다시는 따라오지 않았다. 나도 고등학생이 된 이후엔 잠이 너무 부족해서 주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싫어 잘 따라가지 않았고, 성인이 된 후 친구들과 두세 번 간 것이 전부다.
중간 지점에서 1분 정도 앉아있던 것 빼곤 거의 쉬지 않고 걸었고 두 시간쯤 걸려 정상에 도착했다. 커다랗고 비스듬한 바위 표면을 따라 조심스레 평지로 내려가자 노점에서 생수와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어릴 때는 이런 곳에서 파는 칡즙도 자주 마셨는데. 옆에는 정상석 옆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의 행렬로 북적였다. 여럿이 왔으면 나도 줄을 섰겠지만 지금은 그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바로 출발했다.
크런키 초코바를 까 먹으면서 서울대 방향으로 하산했다. 크런키 초코바는 군대에서 다른 이름(엑스파이브)으로 파는 걸 처음 먹어봤는데 특유의 바삭함과 땅콩 크림의 조화가 마음에 들어 즐겨찾는 제품이다. 하지만 이 때는 수분 함유량이 많은 과일, 이를테면 오렌지가 먹고 싶었다. 다음에는 챙겨와 볼까. 등산용 지팡이도 하나 사야 하나, 내려가서 뭘 먹을까, 맥주 마시고 싶다 등의 생각을 하며 한 시간 정도 걷자 대학 부지가 보였다.
샤로수길까지 버스를 타고 내려가 G가 추천해 준 햄버그집을 갔다. 역시 대학가 쪽은 일반적인 먹자골목과는 다른 종류의 활기가 느껴진다. 목이 말라 제대로 된 펍을 갈까도 고민했지만 아직 좀 이른 시간이라 개점한 곳이 없는 것 같았다. 고맙게도 햄버그집에서 생맥주를 팔고 있었고 음식 맛도 괜찮아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겼다.
산을 오르는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따금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불규칙한 바위 언덕을 오르내리고 높은 곳에서 도시를 조망하는 것은 은은한 즐거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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