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25.
이번 행성 정렬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20년 동안 다시 오지 않을 천문 이벤트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수성부터 토성까지의 행성이 황도를 따라 태양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늘어선 데다 천왕성, 해왕성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직선상에 있다. 게다가 오늘내일은 달이 지구 자리에 들어가니 그야말로 완벽하다.
곧 장마철이라 전국적으로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씨가 계속된 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오늘 새벽 동해 쪽이 맑다는 예보가 있어 바로 떠나게 되었다.
예전에 한 번은 유성우를 보겠다고 기상청 예보를 믿고 혼자 차를 빌려 조경철 천문대까지 간 적이 있다. 그 날은 완벽하게 구름이 껴서 결국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만 잔뜩 보고 왔다. 그날처럼 헛수고를 하지 않길 빌면서, 3일간 집에 못 들어가고 회사에서 일하다 온 J와 길을 나섰다.
유사시 나도 운전할 수 있도록 보험은 들어 놨지만 결론적으로 운전은 J가 다 했다. 오랜만에 나도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야간 운전을 하고 싶었던 터라 조금 아쉬웠다. 대신 나는 주차비, 간식비, 만땅 주유비, 숙식 제공 등의 지원을 맡았다.
가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같이 나이를 먹어 가는 고등학교 친구 모임의 일원으로서 나눌 얘기가 참 많다. 다같이 고등학생 때 만화 본 얘기, 대학교 방학 때 밤새 게임한 얘기, 해외여행 간 얘기. 그리고 지금은 그럴 수 없어졌다는 얘기. J도 여전히 자유로웠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더 자주 모여 놀고 싶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도 가끔은 옛 추억을 떠올리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런지.
세 시 반이 되지 않아 낙산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날씨는 매우 좋았다. 야영지임에도 스피커에서 지속적으로 소음이 나 거슬렸다. 밤바다는 역시 쌀쌀해서 담요를 어깨에 걸친 채 셔터를 눌러 댔다. 조명 때문에 밝았지만 적어도 도심보단 별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행성을 보자 사교도 의식이라도 치르고 싶었다.
수성이 수평선 위로 올라올 시각이 되었지만 태양도 같이 떠오르고 있어 주변시를 이용해야 겨우 보일까말까 했다. 충분히 밝아졌을 때 촬영을 마치고 동이 트는 것을 구경했다. 뭔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어 힘이 났다. 새벽에 바닷가에서 이러고 있으니 옛날에 갑자기 T가 우리를 불러 밤 기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떠났던 기억이 난다.
J가 장인, 장모님과 점심식사 약속이 있어 주변 관광은 하지 않고 바로 서울로 출발했다. 식사 후엔 신혼집도 알아보러 가야 한다던데 이렇게 따라온 것을 보면 정말 경이로운 체력이다. 매번 너희들과 놀러가고 싶다고 한숨쉬면서 이렇게 번거로운 일투성이인 결혼까지 하려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올라올 때는 살짝 졸았다. 미국에 출장갔을 때 너무 피곤해서 졸음운전을 하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운전하고 있었으면 위험했을 수도 있겠다. 도착해 편의점에서 사 온 간단한 음식으로 아침을 때우고 눈을 붙였다. 중간에 J가 떠나고 나는 좀 더 잤다. 이 집을 지인들이 편안하고 쾌적하게 묵거나 즐기다 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자취를 시작하면서 세운 목표였는데, 적어도 J는 제대로 이용하고 있다.
오후에 일어나 집을 정리하고 사진 편집을 마쳤다. 라이트룸이 천체사진에 대해서는 파노라마 합성을 잘 해 주지 못해 아쉽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한다. 다만 은하수를 찍을 생각을 아예 못 한 실책은 크다. 언젠가 다같이 안반데기로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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