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낡은 바디필로우를 떠나보내며

juo 2022. 7. 18. 00:48

2022. 7. 8.

나는 잘 때 베개가 많은 것을 좋아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보우가 처음으로 등장할 때 아기방의 베개 아래 파묻혀 있었는데, 저런 곳에서 자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래서 옛날부터 머리에 벨 낮은 베개, 껴안거나 아래 깔려 잘 길쭉한 바디필로우, 발 부빌 푹신한 베개, 이렇게 3개를 사용했다.

여태까지 쓰던 바디필로우는 언제 산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 하나데코의 황록색 쿠션이다. 오래 써서 여기저기 헐어 구멍이 났으며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안팎에 묻어 있고 코를 대고 숨을 들이쉬면 냄새도 난다. 후타바 안즈의 토끼 인형이 더 낡으면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예전부터 어머니가 그만 버리라고 했지만 아직까지 대체재를 찾지 못해 자취방에까지 가져와 쓰고 있었다.

이 베개는 아래와 같은 점에서 마음에 든다.

  • 촉감: 굵은 실로 짠 면 재질로 부비는 맛이 적당히 있고 시원하다.
  • 솜: 오래되어 탄력 없이 푹 꺼진 솜이 적당한 무게감으로 포근하게 몸을 감싼다.
  • 모양: 원통이 아니라 높이가 낮은 직사각형 모양에 가까워 가로 면적이 넓어 껴안기에 좋다.

나도 슬슬 새 것을 마련해야 할 때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하나데코에서는 이제 동일한 상품을 팔지 않는 듯했고, 백화점이나 침구 매장을 돌아봐도 이렇게 완벽한 제품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점점 뜯어진 곳이 벌어져 속이 흘러나올 정도가 되어 그만 포기하고 새 것을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착한 베개는 물론 저번 것보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솜이 너무 빵빵하고 길이가 약간 짧고 겉감 실이 얇아 오돌토돌한 맛이 덜하다. 하지만 오리가 7마리 그려져 있는 디자인이 나름 귀여웠고, 인터넷에서 파는 다른 제품보다는 나아 보였다.

언젠간 적응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쓰레기봉투에 베개의 솜을 욱여넣고 있자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영원하길 바라지만 세상에 그런 건 없다. 떠나보낼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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