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내가 만든 첫 아크릴 굿즈

juo 2022. 7. 20. 00:17

2022. 7. 7.

중학생 때였나 서울 코믹월드를 몇 번 갔다. 부모님께 용돈을 2~3만원 받아 당시 유행했던 강철의 연금술사, 마비노기, 역전재판 등의 굿즈를 주로 샀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인쇄해 코팅한 그림을 볼체인에 건 팬시를 많이 모았고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막상 실사용하긴 좀 뭐해서 달고 다닌 적은 없다.

그림을 업으로 삼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취미로라도 이런 행사에 참가해서 근사한 물건을 팔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해 봤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의지와 행동력이 없었고 실력은 더더욱 없었기에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잘 그려진 작품을 많이 보고 베껴 그리는 연습을 했다면 좋았겠지만 딱히 그림을 더 잘 그려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낙서를 끄적이기만 했으니 실력이 늘 리 없었다. 지금은 보는 눈도 생겼고 아이패드와 애플펜슬이라는 훌륭한 도구가 생기면서 적어도 그때보단 괜찮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요새는 작품도 너무 많고 유행도 빨리 바뀌어 꾸준히 좋아하는 컨텐츠는 하나 정도를 제외하곤 없다. 버추얼 유튜버 채널인 세아스토리다. 전 직장 재직 당시 퇴근 셔틀안에서 생방송을 보며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았던 기억이 난다. 전세계적인 인기 채널인 홀로라이브에 비하면 마이너지만 코드가 맞는다면 재미만큼은 진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이너는 양질의 굿즈나 일러스트가 많이 나오지 않아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팔 수밖에 없다. 열심히 우물을 파도 사람들의 호응이 없는 것이 또 마이너의 슬픔이다. 그렇게 팬아트를 조금씩 그렸는데, 갑자기 그 옛날의 꿈이 되살아났는지 내가 그린 그림으로 굿즈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단순한 그림체로 스티커는 뽑아본 적이 있지만 이번엔 아크릴 스탠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서 조금 더 “잘" 그린 그림이 필요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한 번 그려 봤지만 생각한 퀄리티가 나오지 않아 포기했다. 그러다 최근 낙서한 것 중 괜찮은 그림이 뽑혀서 그 쪽 업계 사람인 G에게 첨삭을 받아 채색을 마쳤다. 내가 그린 것치고는 괜찮은 결과물이 나왔다.

그렇게 세아 마크 2, 3의 아크릴 스탠드를 각각 50개씩 만들어 20세트는 기념으로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로 하고, 30개는 7월 7일 세아 생일 기념으로 세아 팀 앞으로 부쳤다. 세아스토리 팀원들이 각자 한두 개씩 가져가고 남는 것은 시청자들에게 추첨으로 줘도 좋겠다 싶었지만 ‘내 그림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 애매한 양을 보내게 되었다. 오늘이 생일선물 언박싱 방송일이었는데 “저도 주세요”라는 시청자들의 채팅이 보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설마 내 그림을 누군가 좋아해 주다니!

뜻밖에 기뻤던 것은 글씨가 예쁘다는 세아의 반응이었다. 나는 평소에 글씨를 날려 쓰는 편이라 대학생 때 강의 필기한 노트를 보면 해독이 필요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 날 강의가 다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필기한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정제된 글씨로 정리하곤 했었는데. 노력하면 잘 쓸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나.

나는 어렸을 때 꿈꿨던 것을 약간은 다른 방향이지만 조금씩이라도 이뤄 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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