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코즈믹 호러에 대항하는 법

juo 2022. 7. 24. 01:00

2022. 7. 17.

자기 전에 오랜만에 보드게임 『엘드리치 호러』를 꺼내 펼쳤다. 며칠 전 번역 개선 구성물을 받고 정리하다 보니 다시 해 보고 싶어졌다. 혼자 조사자 두 명을 잡고 요그 소토스에게 도전했다.

기억이 조금은 남아 있어 규칙서를 한 번 훑어보고 바로 플레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자비가 없는 난이도다. 차원문이 여기저기 열린 채 방치되고 조사자가 세 명이 쓰러지는 와중 어떻게 미스테리는 모두 해결했으나, 바로 이어지는 신화 단계에서 고대의 존재가 깨어났고 파멸 토큰 전진 효과로 새벽 3시가 조금 되지 않은 시각에 그렇게 세계는 멸망했다.

정리 후 자려고 누워 러브크래프트의 원전을 읽었던 때를 생각해 봤다. 크툴루 신화를 즐기는 자로서 한 번쯤 읽어봐야지 하고 전집을 읽어 봤는데, 묘사가 너무 장황해 안그래도 빈약한 상상력에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코즈믹 호러를 묘사하기 위해 굳이 상상 속의 괴물을 만들 필요까진 없다. 죽음과 우주의 멸망 그 자체가 실존하는 코즈믹 호러인데.

모든 사람이 나처럼 죽음이란 것을 생각하고 때로는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모든 것이 사라질 텐데 직장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편히 여행이나 하며 흘러가듯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로망은 로망일 뿐, 그러려면 평생 쓸 돈을 미리 모아놓거나 충분한 불로소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룰 수 없는 로망 대신 비싸고 근사한 음식이나 먹기로 했다.

당일 예약할 수 있는 곳은 없어서 자고 일어나 적당히 근처의 히츠마부시 음식점에 방문했다. 비 예보는 없었는데 중간쯤 걸어갔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다행히 흠뻑 젖지는 않았다. 맛은 예전에 갔던 마루심이 더 맛있었던 것 같지만 먹을만은 했다.

밖에 나온 김에 오늘도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상설전시관 2층을 관람했다. 카페도 근사해 보였지만 주문 가능 시간이 지나 다음에 3층을 마저 보러 와 즐기기로 했다.

저녁은 뭘 먹을까 고민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 근처는 사무실이 많아 주말이면 식당이 대부분 문을 닫는다. 냉장고의 카레는 내일 점심에 먹기로 하고, 바닥에 누워 배달 음식을 살펴보다 잠깐 졸았다. 항상 메뉴를 고를 땐 오래 고민하게 되는데 나도 대체 내가 뭘 먹고 싶은지 모르겠다. 결국 마라샹궈를 시켰고 역시 “배민맛"이 났다. 포장 용기에 멋없이 채워진 음식은 썩 맛있지는 않으면서 양만 많아 늘 반은 남기게 되며 플라스틱 쓰레기도 산처럼 나온다. 뒷정리까지 해야 하는데 오늘은 설거지를 하다 제주 맥주 전용잔도 하나 깨먹었다.

앞으로 두 달에 한 번쯤은 스시 오마카세나 파인 다이닝 등의 맛집을 가자고 마음먹었다. 친한 친구 여럿과 같이 즐기는 편이 더 좋겠지만 뭔가 할 때마다 친구들을 소집하려 했다간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 이 정도 가격의 식비를 흔쾌히 낼 만한 사람은 주변에 없다. 다행히 돈이 좀 드는 식당은 이래저래 혼자 가기에 부담이 없다. 인생을 알차게 즐기기 위한 단기 목표: 고독한 미식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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