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9.
꽤 오래전부터 공을 싫어했다. 평평한 바닥에서도 좀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위협적으로 날아오는 일이 부지기수니 도무지 좋아할 구석이 없다. 하지만 학창시절 체육 선생님들은 ‘공만 던져 주면 애들끼리 알아서 잘 놀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 나는 그때마다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초등학생 때 짝퉁 피버노바 축구공을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와 한두 번 공차기를 했던 것도 같은데, 남과 경쟁하는 것 자체를 즐기지 않는 성격 탓인지 결국 축구에 흥미를 붙이지는 못했다. 쉬는 시간마다 한 반의 1/3 정도는 우르르 운동장으로 몰려나가 다른 반과 합류해 흙먼지를 날리며 축구공을 핀볼마냥 하늘 높이 뻥뻥 차올리던 때도 축구는 재미 없는 구경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군대에서는 억지로 축구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때 안경 한가운데 공을 맞아 생긴 11자 모양의 흉터가 아직 미간에 남아있다.
축구는 그렇다치고 피구는 또 어떤가? 무서워서 잡는 것은 못 하는 주제에 이리저리 피하기만 하다 보니 마지막까지 남아있다 무력하게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언젠가부터 친구들 팔 힘이 좋아져서 공도 정말 매섭게 날아왔던 것 같다. 체육 시간에 시간이 남으면 피구를 시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정말이지 공포의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야만적인 스포츠다.
야구는 공이 너무 단단해 맞으면 아플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고 농구는 몸싸움이 싫었다. 수행평가로 슛 연습은 좀 했었는데 갈수록 성공률이 낮아지는 기현상을 겪고 결국 C를 받았다.
대학생 때 동아리 합동 발야구에 강제로 참가한 이후로 겨우 공을 접할 일이 사라진 나였건만 G가 갑자기 프리스비와 럭비공을 샀다며 친구들을 소집했다. 잠깐 고민해 봤는데 머리아픈 규칙 없이 그저 던지고 받는 것뿐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최근 몸을 움직여야 할 필요도 느껴졌고. 조율 끝에 오늘 4명이서 『짱구는 못말려: 수수께끼! 꽃피는 천하떡잎학교』를 본 후 시작하기로 했다.
“우리가 상영관 평균 연령을 극적으로 올려 주겠어”라며 자리에 앉았지만 정작 내부에는 어른들이 대부분, 아니 자세히 보니 어른들밖에 없었다. 중간중간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 부분도 있었고 여러모로 완성도 있는 작품이라 재밌게 봤다. 쓸 일은 없겠지만 관람 특전인 마우스패드도 잊지 않고 챙겼다.
쌈밥 점심을 먹고 서울대로 이동했다. 이 학교는 올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넓다. 광활한 잔디밭은 재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에겐 딱 좋았다. 자리를 잡고 일단 럭비공을 꺼내 던지기 시작했다. 그저 네 명이 서로에게 공을 던지고 잡고 놓치고 할 뿐이었지만 어쩐지 재미가 있었다. 공이 얼굴로 접근할 땐 약간 겁이 나긴 하지만. 프리스비는 처음 가지고 놀아 봤는데 생각보다 천천히 날아가고 가벼워 손가락이 삘 위험이 적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놀다가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한바탕 움직이고 나니 졸음이 왔다. 왜 어른들이 단체로 놀러가면 먹고 마시고 족구하다 자리에 드러누워 주무시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좀 쉬고 체력이 회복되자 신기하게도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G에게 또 가끔 이런 자리를 만들자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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