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혼자 호텔놀이

juo 2022. 11. 14. 01:13

2022. 11. 4.

호캉스란 단어가 나오기 전에 이미 호텔놀이란 것이 유행한 적이 있다. 나도 장기 출장으로 쌓인 포인트를 털기 위해 친구들과 간 적은 있지만, 내 돈으로 혼자 별 이유 없이 호텔에 투숙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다. 며칠 전부터 고민하다 도미 인 호텔에 빈 방이 생긴 것을 보고 결국 예약을 한 것이다. 집이랑 가까워 심적 부담이 없었고 대욕장이 있다는 것에 끌렸다.

투숙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서 오후 반차를 사용했다. 체크인은 3시였으므로 남는 시간을 이용해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 콜라보가 진행 중인 용산 건담베이스 구경을 갔다. 역 천장에는 거대한 건담이 매달려 있었고 여기저기 등신대 판넬이 놓여 있었다. 내일 G에게 줄 생일선물로 에어리얼 건프라와 베이스를 샀다. HG라 가격은 싸면서 퀄리티는 옛날 모델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내 것도 하나 살까 했으나 돈 나갈 일이 많아 지금은 꾹 참고 건프라보다 비싼 핀셋 하나를 집어오는 걸로 참았다. 학생 때는 감히 사고 싶다는 생각도 조심스러웠는데, 지금은 싸게 느껴지니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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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언덕길 위에 있었다. 좁은 1인실이었고 전형적인 일본식 비즈니스 호텔, 이를테면 토요코 인이 떠오르는 방이다. 책상에 랩탑과 듀얼 모니터로 쓸 아이패드, 키보드를 올려놓고 러스트 공부를 시작했다. 호텔에서 노트북을 펴고 코딩을 하고 있자니 오랜만에 해외 출장을 온 기분이었다. 공부하기 편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가끔 환경을 바꾸는 것은 집중에 도움이 된다.

대욕장에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애매한 시간에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수건을 한 장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이미 아저씨 두세 명이 있었다. 실망스럽게도 내부는 동네 목욕탕보다 작아 이름값은 못 했지만 오랜만의 목욕이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예전엔 섭씨 38도에서 39도 사이의 탕 온도를 선호했지만 코로나 시국 몇 년 동안 나이를 먹으면서 감각도 같이 무뎌졌는지 40도 내외의 온도도 “들어갈 수는 있는” 허용 범위로 들어왔다.

1인용 나무 원통 가장자리에 목과 다리를 걸치고 누웠다. 천장에는 물그림자가 비치고 있었고 피아노 음악이 있는 듯 없는 듯 흘러나왔다. 눈을 감고 뭔가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 생각들이 물에 모두 녹아 나오는 듯이 머릿속이 텅 비어갔다.

그대로 얼마간 쉬다가 잠깐 몸을 식힐 겸 일어나 입구 쪽 선반을 봤는데 내가 가져온 수건이 없었다. 누군가 가져간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어져서 잠이 확 깼다. 이런 수준 이하의 사람들과 섞여 사는 사회라니. 비치된 전화로 프런트에 얘기하자 다행히 새 수건 두 장을 가져다줬다. 몸이 식은 김에 탕에 조금 더 몸을 담갔다. 이번엔 수건은 바깥 사물함에 넣어둔 채로. 나갈 때 바닥을 좀 적시겠지만 또 수건을 도둑맞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식사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배가 고파왔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는 제공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옷을 다시 챙겨 입고 나왔다. 뜨거운 욕탕에서 나와 느끼는 찬 공기, 몇 년간 느끼지 못했던 상쾌함이다. 언덕을 넘어 강남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익숙한 거리와 익숙한 인파를 보는 것만으로 여행 기분은 싹 달아났지만 맛있는 맥주 세 잔과 농어로 만든 커다란 피시 앤 칩스는 마음에 쏙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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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 공부를 이어서 하다 한정 시간 동안만 제공되는 무료 라멘을 먹으러 갔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대화 소리로 보아 일본인이나 중국인도 많이 투숙하고 있는 듯했다. 예전에 동생과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어딘가의 료칸에서도 이런 서비스가 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곳의 라멘은 간장 베이스에 간단한 멘마 고명 등의 구색은 갖췄으나 맛은 별로라서 준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이 좋겠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새벽에 한 번 더 욕장을 가야 했겠지만 몹시 피곤한 데다 내일은 평소의 주말보다 3시간쯤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어야 했으므로 그냥 자기로 했다. 호캉스란 것이 가성비가 썩 좋진 않지만 약간의 기분 전환은 되어준 듯하다. 해외여행이 막혔을 때 비행기 무착륙 관광을 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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