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4.
호캉스란 단어가 나오기 전에 이미 호텔놀이란 것이 유행한 적이 있다. 나도 장기 출장으로 쌓인 포인트를 털기 위해 친구들과 간 적은 있지만, 내 돈으로 혼자 별 이유 없이 호텔에 투숙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다. 며칠 전부터 고민하다 도미 인 호텔에 빈 방이 생긴 것을 보고 결국 예약을 한 것이다. 집이랑 가까워 심적 부담이 없었고 대욕장이 있다는 것에 끌렸다.
투숙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서 오후 반차를 사용했다. 체크인은 3시였으므로 남는 시간을 이용해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 콜라보가 진행 중인 용산 건담베이스 구경을 갔다. 역 천장에는 거대한 건담이 매달려 있었고 여기저기 등신대 판넬이 놓여 있었다. 내일 G에게 줄 생일선물로 에어리얼 건프라와 베이스를 샀다. HG라 가격은 싸면서 퀄리티는 옛날 모델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내 것도 하나 살까 했으나 돈 나갈 일이 많아 지금은 꾹 참고 건프라보다 비싼 핀셋 하나를 집어오는 걸로 참았다. 학생 때는 감히 사고 싶다는 생각도 조심스러웠는데, 지금은 싸게 느껴지니 신기하다.
호텔은 언덕길 위에 있었다. 좁은 1인실이었고 전형적인 일본식 비즈니스 호텔, 이를테면 토요코 인이 떠오르는 방이다. 책상에 랩탑과 듀얼 모니터로 쓸 아이패드, 키보드를 올려놓고 러스트 공부를 시작했다. 호텔에서 노트북을 펴고 코딩을 하고 있자니 오랜만에 해외 출장을 온 기분이었다. 공부하기 편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가끔 환경을 바꾸는 것은 집중에 도움이 된다.
대욕장에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애매한 시간에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수건을 한 장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이미 아저씨 두세 명이 있었다. 실망스럽게도 내부는 동네 목욕탕보다 작아 이름값은 못 했지만 오랜만의 목욕이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예전엔 섭씨 38도에서 39도 사이의 탕 온도를 선호했지만 코로나 시국 몇 년 동안 나이를 먹으면서 감각도 같이 무뎌졌는지 40도 내외의 온도도 “들어갈 수는 있는” 허용 범위로 들어왔다.
1인용 나무 원통 가장자리에 목과 다리를 걸치고 누웠다. 천장에는 물그림자가 비치고 있었고 피아노 음악이 있는 듯 없는 듯 흘러나왔다. 눈을 감고 뭔가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 생각들이 물에 모두 녹아 나오는 듯이 머릿속이 텅 비어갔다.
그대로 얼마간 쉬다가 잠깐 몸을 식힐 겸 일어나 입구 쪽 선반을 봤는데 내가 가져온 수건이 없었다. 누군가 가져간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어져서 잠이 확 깼다. 이런 수준 이하의 사람들과 섞여 사는 사회라니. 비치된 전화로 프런트에 얘기하자 다행히 새 수건 두 장을 가져다줬다. 몸이 식은 김에 탕에 조금 더 몸을 담갔다. 이번엔 수건은 바깥 사물함에 넣어둔 채로. 나갈 때 바닥을 좀 적시겠지만 또 수건을 도둑맞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식사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배가 고파왔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는 제공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옷을 다시 챙겨 입고 나왔다. 뜨거운 욕탕에서 나와 느끼는 찬 공기, 몇 년간 느끼지 못했던 상쾌함이다. 언덕을 넘어 강남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익숙한 거리와 익숙한 인파를 보는 것만으로 여행 기분은 싹 달아났지만 맛있는 맥주 세 잔과 농어로 만든 커다란 피시 앤 칩스는 마음에 쏙 들었다.
돌아와 공부를 이어서 하다 한정 시간 동안만 제공되는 무료 라멘을 먹으러 갔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대화 소리로 보아 일본인이나 중국인도 많이 투숙하고 있는 듯했다. 예전에 동생과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어딘가의 료칸에서도 이런 서비스가 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곳의 라멘은 간장 베이스에 간단한 멘마 고명 등의 구색은 갖췄으나 맛은 별로라서 준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이 좋겠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새벽에 한 번 더 욕장을 가야 했겠지만 몹시 피곤한 데다 내일은 평소의 주말보다 3시간쯤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어야 했으므로 그냥 자기로 했다. 호캉스란 것이 가성비가 썩 좋진 않지만 약간의 기분 전환은 되어준 듯하다. 해외여행이 막혔을 때 비행기 무착륙 관광을 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쓰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4번째 부산 여행 (0) | 2022.11.26 |
---|---|
미용실 공포증 (0) | 2022.11.15 |
그냥 료칸을 가고 싶은 날 (0) | 2022.11.09 |
타인의 죽음들 (0) | 2022.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