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여행 같은 하루

juo 2022. 12. 5. 01:14

2022. 11. 27.

평소의 주말처럼 느지막이 일어났다. 원래대로라면 삼성역으로 나가 점심을 먹고 S의 생일맞이 케이크를 하나 사서 G네 집으로 가 『킹스 딜레마』 보드게임의 첫 모임을 가질 예정이었다. 『사자의 턱』도 1/5 정도밖에 진행하지 못한 상황에 새 게임을 시작해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G의 강력한 희망으로 동시에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사자의 턱』은 좀 피곤하다고 하던데 이게 체력 문제인지 비디오 게임을 안 하는 사람의 문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쌓인 카톡 메시지를 보니 K의 사정으로 취소된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시간이 비게 되어서 인터넷에서 우연히 봤던 갤러리 전시를 구경하러 가기로 했다. 근처에 점찍어놨던 음식점인 우육면관이 있었다. 역에서 거기까지 가는 길은 적당히 흐리고 한산해서 왠지 주말 느낌이 물씬 났다. 면에 든 고기가 맛있었지만 조금 짜서 오이를 같이 시키지 않았으면 질렸을지도 모르겠다. 식사 후 걸어서 국제갤러리까지 갔다. 조금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한복을 빌려 입은 사람들과 외국인 관광객이 눈에 많이 보였다.

갤러리에 들어가자 카운터 맞은편 벽에 작가 이름 “이기봉”과 전시 제목인 『Where you stand』가 깔끔하게 적혀 있었다. 바로 옆에 보이는 관으로 들어가자마자 벽에 걸린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실제로 본 적이 있을 것만 같은 물안개가 낀 강가나 숲 속 풍경을 그린 작품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림 위에 뒤가 비쳐 보이는 천을 덧대고 거기에 다시 그림을 그려 뿌연 안개를 표현한 동시에 깊이감을 준 것이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멋졌는데 이건 실제로 갤러리 내부를 걸어 다니며 관람해야 온전히 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그림이 안 그렇겠냐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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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안쪽에 동일한 기법으로 그린 흑백 연작이 더 전시되어 있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큰 그림은 다른 그림과 다르게 형태가 명확하지 않았지만 천 뒤쪽의 그림 곳곳에 하얗게 빈 공간이 있어 마치 숲 속 나무 사이로 햇빛이 새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게 특이했다. 전시된 그림은 10점이 조금 넘어 많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보고 싶은 작품이다.

시간이 남아 바로 옆의 국립민속박물관에 들어갔다. 한국인의 하루, 1년, 평생을 테마로 각 전시관을 나눈 구성이 좋았다. 근대의 문화까지 소개하고 있었는데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 겪었을 리 없는 추억을 실제로 겪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별 전시관 마지막에는 보름달이 투영되어 있었고 아래 스크린에서 키보드로 소원을 입력하면 그 소원이 달로 올라가는 모양이었다. 취직, 합격, 로또 등의 평범한 소원이 있는가 하면 “중국 정권 교체”라거나 “트럼프가 접(“법”의 오타로 보인다)의 최대 한도 내에서 체포 및…”같은 재미있는 글귀도 있었다. 나는 “불로불사를 누리게 해 주세요”라는 소박한 소망을 적어 올렸다.

저녁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있어 삼청동 거리를 걸었다. 전 회사에서 선배들과 출사를 한 번 온 적이 있었는데, 이후 회사 생활이 팍팍해져서 그럴 여유를 갖지 못했다. 지금은 다들 결혼하시고 육아를 시작하셔서 그렇게 놀러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너무 한국적이어서 오히려 이국적인 거리를 관광객들과 함께 걷고 있자 나도 같은 관광객이 된 기분이 들었다. 아까 전시관에서 달 위에 “매일이 여행 같았으면”이라는 예쁜 소원이 적혀 있었는데, 적어도 오늘은 여행 같은 하루를 보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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