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4.
J가 계획한 영양 여행의 첫날이다. 왜 이런 아무것도 없는 동네로 숙소를 잡았냐고 묻자 아무것도 없는 동네에서 회사 일을 모두 잊고 쉬고 싶어서라고 한다. L사에서 매일 야근을 하며 노예처럼 굴려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짐을 싸들고 부평으로 출발했다. 카메라맨으로서 매번 챙기는 미러리스, 삼각대에다 이번엔 새로 산 렌즈까지 가방에 넣으니 짐이 너무 무거웠다. 보드게임 담당도 맡고 있는 입장이지만 이번엔 욕심내지 않고 부피가 작은 보난자와 펭귄 파티만 챙겼다.
마트에 모여 음식 담당인 S의 지시에 따라 장을 보고 근처의 순대국밥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은 후 출발해 새벽에 영덕 해안가에 도착했다. 할 일도 없으니 차박을 하고 새벽에 해를 보자는 J의 의견에 따랐다. 렌트한 카니발이 넓긴 했지만 5명이나 되니 각자 자리에서 최대한 의자를 눕혀서 잘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도 잠을 잘 못 자는데 자리가 매우 불편해서 자세를 바꾸며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 와중 J는 잘 잔 것 같으니 신기하고도 부러운 일이다. 편히 누울 수 없는 차박은 다시는 안 할 것이다.
일출을 보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우리는 새해 첫 날 일출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그냥 아무 날에 가끔 일출을 봤던 것 같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싫지만 친구들과 가는 이벤트는 환영이다.
솔샘온천으로 휴식을 취하러 왔다. 안성맞춤인 물 온도와 노천 온천의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하지만 찜질방이 아니라 리조트 옆에 딸린 부가 컨텐츠에 가까워 목욕하고 나온 후의 즐길거리가 없어서 아쉬웠다.
나와서 바로 앞의 송이버섯 집에 밥을 먹으러 갔다. 하지만 향이 약해 그냥 평범한 백반을 먹은 느낌이었다. 주변에 킴스 마운틴 커피라는 카페가 있어서 들러 봤다. 커피를 즐기지 않아 맛은 잘 모르겠지만 눈앞에서 커피를 내리는 과정이 재미있었고, 카페 내부의 분위기는 충분히 좋아 만족했다.
별 거 없던 영양의 랜드마크 몇 곳을 방문하고 숙소인 한옥 펜션 유유당에 도착했다. 정말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온전히 우리만 있는 공간이었다. 주인 내외 분들이 평소에 생활하다 손님이 오면 내 주는 공간인 듯하다. 한 방은 보일러, 한 방은 장작을 때어 덥히는 구들장이 있었다. 장작을 패 보고 싶어 나도 시도해 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딱 한 번 쪼개는 데 성공하고 만족한 후 힘 좋은 친구들에게 도끼를 넘겼다.
할 일이 없었기에 일찍부터 요리를 준비했다. 이번에 S가 계획한 것은 소고기 꼬치구이다. 나도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우리끼리 놀러오면 항상 S의 지시를 따른다. 요리를 대충 하는 부분이 있어 맛이 애매할 때도 있지만 내가 평소엔 하지 않는 음식이라 배우는 것도 있고 재밌다. 삼겹살, 소시지와 산처럼 쌓인 꼬치를 구워 먹고 나니 모두들 배가 불러 소고기 한 팩은 냉장고로 돌아갔다. 고등학생 시절 급식을 누가 더 빨리 먹는지 경쟁하던 친구들도 나이가 먹고 나니 먹는 양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 웃기면서 씁쓸하다.
잔불에 쫀드기 등의 과자를 구워먹었다. 역시 쫀드기는 굽는 것이 맛있다. 위생적이진 않았지만 문방구점 앞에 놓인 굽기 기계에 뭐든 구워 먹었던 때가 기억난다. 요새 아이들은 이런 맛을 알까. S는 낮잠을 자고 나머지는 숙소에 비치된 윷놀이를 했다. 나는 두 판을 역전패당해 생마늘 두 개를 먹어야 했다. 옛날에 친척들이 모였을 때 윷놀이를 싫어했던 이유가 떠오르는 듯했다.
가져온 보드게임을 좀 돌리다 보니 S가 일어났다. 시간이 좀 남는데, 그제사 보드게임을 좀더 가져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거운 짐을 든 채 전철에서 앉지도 못하고 서울에서 인천까지 내려오는 건 너무 힘든 일인걸.
어느덧 완전히 어두워졌다. 대보름 전날이라 달이 밝아 별이 많이 보이진 않았다. 망원 렌즈로 달만 찍어 봤는데 예쁘게 잘 나오지만 아직 부족하다, 역시 어린 시절 꿈꿨던 천체 망원경을 사야 하나.
불장난은 나이와 상관없이 재밌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장작을 쪼개 불을 피우며 T와 S가 장작을 쌓는 방법을 놓고 한참 티격태격거리는 것을 들었다. 야식으로는 알리오 올리오를 먹었다. 페페론치노가 좀 많이 들어가 기침을 유발했다. 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오일 파스타는 조개를 많이 들이부어야 맛있는 것 같다.
맥주를 마시다 보난자로 잠자리와 설거지 담당을 정하려 했는데 T와 Y가 12시도 전에 구들장 방에 들어가 자기 시작했다. 이건 체력들이 너무한 거 아닌가. 그냥 내가 설거지를 하고 J는 거실 전기장판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나는 혼자라도 남은 맥주를 먹으려 꺼내왔는데 S가 나와 같이 맥주를 깠다. 그렇게 셋이서 중고등학생 시절의 얘기를 나눴다. 재밌고 좋은 시절이었다. 특히 고등학생 때는 이렇게 평생 같이할 친구들도 만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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