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친구들과의 여행 계획도 각자의 사정에 의해서 깨졌고 그들 중에 가장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이대로 방학을 끝낼 수 없다! 혼자라도 다녀오겠어!" 라며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던 것이다. 그렇게 갑자기 자아를 찾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항공편 가격 비교하고 알아보기 귀찮아서 그냥 유일하게 이름을 아는 저가항공인 진에어로 끊었다. 싼 시간대로.
전재산
사진을 찍긴 찍어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내 얼굴은 하나 없이 풍경사진만 잔뜩 남게 될 것이다. 남에게 찍어달라고 하는 것도 한두번이지. 그래서 출발 전까지 망설이다 삼각대를 챙겨갔다. 사진과 같이 운반하기 위해서 가방도 바꿨다.
가방엔 갈아입을 옷, 츄리닝 반바지, 양말 등의 의류와 함께 모자, 충전기, <이기적 유전자>를 넣었다. 좀 무겁긴 하지만 혼자 하는 여행에 느긋하게 읽을 책 한 권은 필수다.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무심한 듯 시크한 도시 남자를 연출할 수 있었다. 복장은 마치 등산하는 동네 아저씨였지만 기분이라도.
언제 출발하나...
집에서 바코드 출력해온 것을 주니 탑승권으로 교환해 준다. 근데 정작 탑승권은 장식이고 바코드 출력해온 것이 탑승할 때까지 필요했다. 한 번 보여주곤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놨었는데, 사람 많은 가운데 다시 꺼내야했다.
삼각대는 무기로 취급되지 않고 보안검색대를 통과했고, 부모님이 가방에 넣어놓으신 과도가 걸려서 소유권을 포기했다. 모아서 기부한다고 한다. 현재 지구 반대편에서 그 과도를 누군가 쓰고 있을까.
자리가 딱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구역만 정해져있는 관계로 원하는 자리에 앉고 싶다면 줄을 일찍 서야 한다. 난 느긋하게 줄을 섰음에도 어떤 해프닝으로 운좋게 창가에 앉았다. 날씨가 흐려 구름이 멋스러웠다. 근데 도착할 때까지 자서...
차
제주공항에서 지도를 하나 뽑아들고 나왔다. 구름이 많은 날씨였지만 그래도 탐라의 여름은 더웠다. 여기서 렌트를 할 것이냐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이냐가 갈리는데, 나의 경우엔 렌트를 했다.
야자수를 볼 때마다 크라이시스가 생각난다
대중교통은 미리 조사를 하지 않았다면 노선 검색하기가 번거롭고, 구석구석 원하는 곳을 돌아보기가 힘들다. 그래도 주요 관광지로는 다 가는 것 같다. 공항에서 가져온 지도에도 대충 노선은 나와 있고. 이 경우에는 공항 버스를 타고 여정을 시작한다. 교통카드도 이용 가능한데, 탈 때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출발할 때 일괄적으로 행선지를 물어보고 지불한다.
렌트는 아무래도 직접 운전하는 게 귀찮기도 하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으니 편하기도 하고. 공항 앞에 렌트카 업체에서 나온 셔틀이 줄을 서 있을 것이다. 아님 좀 걸으면 업체가 모여있는 렌트카 하우스가 있어서 바로 차를 빌릴 수도 있고. 차 반납 후 공항까지 태워주기도 한다. 이 곳은 렌트 사업이 발달해서 육지보다 가격이 싸단다. AUX 케이블을 준비한다면 폰을 연결해 음악을 들을 수도. 다만 장롱면허인 철없는 여행객들이 많기도 하고, 구불구불 산길이 많고, 신호등이 제대로 안 된 곳이 좀 있다는 점을 고려할 것. 게다가 교통량도 적은 편이 아니다! 그래도 관광지 주차장은 무료인 곳이 많고, 넓어서 좋았다.
세 번째 선택지로 스쿠터 렌트가 있다. 강습도 시켜준단다. 하지만 네비게이션이 없지. 비가 올 것 같으면 피하자.
렌트를 했다면 해안도로와 5.16도로의 숲 터널은 달려보는 것이 예의다.
차 세우고 사진 찍다가 비가 쏟아져서
해운
집 가는 교통편으론 배를 예약했다. 이유는 커다란 배 한 번 타 보고 싶어서. 별 거 없다. 비행기랑 가격 차이도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제주도와 인천을 오가는 배는 청해진해운에서 예약할 수 있다.
제주항 옆 부두에서 빈둥거렸는데 너무 여유를 부려서 여객선터미널까지 뛰어가야 했다. 온라인 예약을 하면 할인을 받을 수 있는데, 직원 분이 인천 시민 할인이 더 싸다고 알려주셔서 그 자리에서 취소 후 다시 표를 끊었다.
탑승시에는 단체 이용객도 모두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 듯. 면세점은 배로 향하는 중에 이용할 수 있었다.
오하마나 호
지금까지 타 본 배 중에 제일 크다. 오하마나는 '오, 아니 벌써?' 라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라고. 확실히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 있으니 맞는 말이다.
들어가서 배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레드 카펫에서부터 금빛 난간 손잡이까지 휘황찬란 번지르르했다. 로비에는 소파와 TV가 있었고 110V, 220V 콘센트가 몇 개 있었다. 나는 마트에서 천 몇백 원에 두 개 하는 어댑터를 가져온 덕분에 소파에 앉아 가져온 책을 읽으며 경쟁자 없는 110V로 충전을 했다. 각 선실에도 110V 콘센트가 있다.
3등실
2등실. 옷걸이와 개인 램프, 커튼이 있다.
3등실은 마룻바닥에 이불 깔고 자나보다. 2등실은 도미토리같이 개인 침대가 있다. 딱 군대 침대와 모포 느낌이다. 그 윗 등급은 말 그대로 방. 5명 이상 같이 여행을 간다면 3등실도 재미있게 갈 수 있겠지만, 난 솔플러에다 편안한 잠을 원하니 2등실로 예약했다. 방마다 TV도 존재한다. 커튼을 치고 개인 램프를 켜고 누워서 책을 봐도 된다.
신발은 신발장에 넣어두고 비치된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녔다. 편의점에서 과자나 맥주, 컵라면 등을 살 수 있고 식당에선 저녁과 아침에 7,000원짜리 식사를 제공한다. 하지만 배 안에선 카드를 쓸 수 없다. 멍청하게 이 사실을 망각하고 현금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던 나는 밥과 맥주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바닷바람을 안주로 맥주 한 캔을 땄다. 선상식, 먹고 싶었는데...
여행 내내 구름이 잔뜩 낀 덕분에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식당에서는 라이브 밴드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어떤 날에는 불꽃놀이 이벤트같은 것도 한단다. 아쉽게도 내가 탔을 때는 그런 거 없었다. 그냥 멀어지는 제주도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잠자리는 편했다. 약간 흔들리는 느낌은 있었지만 배가 커서 그런지 멀미는 하지 않았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동이 트는 것을 봤겠지만 난 아침식사를 알리는 방송 두 번에야 겨우 일어났다. 서해대교를 지날 즈음에도 방송을 틀어줘서 얼른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인천항에 도착하니 드디어 여행이 끝났다는 실감이 난다. 택시가 여럿 대기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버스로 이동. 택시 기사들의 불평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튼 배는 한 번 탈 만한 가치가 있다. 확실히 비행기보다 낭만적이다. 왠지 모르게 비행기를 타면 잠이 들지만 배에선 여유를 즐기게 된다. 혹 다음에 갈 때도 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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