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28.
침대는 인간이 하루의 1/3을 보내는 중요한 가구다. 오피스텔에서 생활한 2년 간, 그리고 본가 벙커 침대에서 잔 몇 달간은 그냥 얇은 매트 위에서 잤고 나도 잠자리를 가리진 않지만(가리지 않고 잠을 못 잔다), 이왕 장만하기로 한 거 침대만큼은 인터넷이나 이케아 등에서 적당히 싼 제품을 살 생각은 없다.
하지만 고급 브랜드 침대는 정말 너무나도 비쌌다, 너무나도. 때문에 내년 적당한 시기 여윳돈이 좀 모이면 살 생각이었지만, 시몬스에서 우리 회사 임직원 대상으로 프로모션을 한다는 메일이 오고야 말았다. 언젠가 살 거라면 이 기회에 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원래 TV를 아버지가 사 주시기로 되어 있었지만 “TV는 알아서 살 테니 (훨씬 비싼) 침대를 사 주세요”라고 말해 놓았다.
평생을 슈퍼싱글 크기의 침구에서 잤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리하려 했는데 회사, 친구, 가족 모두에게 상담을 받아 봐도 이왕 살 거 퀸 사이즈를 사라는 얘기뿐이었다. 아니 다른 사람은 자기 돈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다 쳐도 아버지까지 그렇게 말하시면.
T가 침대 매장에서 상담을 받는 건 따라가 구경한 적이 있지만 직접 상담받는 건 처음이다. 직원 분의 설명을 들으며 이런저런 매트 위에서 누워 있으니 잠이 솔솔 왔다. 나른한 오후여선지 매트가 좋아선지는 모르겠다. 그저 밤에도 이 정도로 잠이 잘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무리 내 돈 나가는 것이 아니어도 너무 비싼 걸 사긴 좀 그렇다. 난 동생과는 다르게 죄책감 없이 비싼 물건을 마구 사지 못하는 성격인 데다 아무리 여유가 있어도 부모님께 무조건적으로 지원받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적당히 중간 정도 등급의 매트를 선택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어느 정도 편안했고. 그 “적당한”가격대도 이미 한참 비쌌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급 라인에서 소프트, 레귤러, 하드 타입의 매트를 한참 비교했어도 결국 결정하게 만든 주 요인은 가격이구나 싶다. 얼마나 부자가 되어야 망설임 없이 상위 등급의 제품을 팍팍 지를 수 있을까.
여기에 프레임, 협탁, 베개, 커버 몇 장까지 더하니 할인을 받아도 엄청난 가격이 나왔다. 소파도 비싼 걸 샀다고 생각했는데 침대는 정말 상상 초월이다. 내 상식과는 다르게 정말 비싼 건 가전이 아니라 가구였다. 최첨단 전자제품보다 비싼 명품 주얼리, 가방을 볼 때마다 들던 느낌을 여기서 다시 느낀다.
돌아오는 길에 트레이더스에서 쿠폰을 사용해 리큐르나 좀 사 갈까 하고 스타필드에 들렀다. 하지만 핸드폰 배터리가 부족해 다음으로 미뤘다. 대신 바깥의 홈 데코 매장을 구경하다 보니 사고 싶었던 큐티폴 고아 커틀러리가 인터넷 가격보다 싼 값에 할인 행사를 하고 있었다. 왜 나중에 사려고 했던 건 전부 지금 할인하는 건지!
내가 커틀러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시애틀의 해산물 전문 식당에서 처음 본 장네론 라귀올 나이프의 곡선이었지만, 집에서 쓰기엔 큐티폴처럼 깔끔한 게 나을 것 같았다. 나이프의 형태도 예쁘고 젓가락이 있어 세트를 갖출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젓가락이 불편하다는 인터넷 의견을 많이 봤었는데 실제로 써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젓가락질 잘 못 하는 사람들의 불평이었던가. 손님용까지 생각해 수저, 포크, 칼, 티스푼을 4세트 구입했다. 뇌에 힘주고 버터나이프까지는 참았다. 우리 집이 무슨 양식 레스토랑은 아니니까.
월급 들어온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거금을 연속으로 쓰니(침대는 내 돈이 아니지만) 영 마음이 불편하다. 다음 달엔 TV와 거실장도 사야 할 테고 부산 여행과 연말 여행도 있는데. 그래도 입주 초반이니 이것저것 돈 나갈 일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자. 좋은 걸 사서 오래 쓰는 것이 옛날부터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내 스타일 아니었던가. 커틀러리에 해바라기씨유를 먹이며 그런 합리화를 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