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하교길에는 늘 검은 양복을 차려입고 학생들의 집전화번호를 따 가는 분들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집 근처에 있던 교회를 처음으로 나가게 되었고 결국 몇 달간 다니긴 한 것 같다. 내가 인간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가장 처음이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고 마침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기독교를 접하면서 신앙심을 가져 보려고 나름 노력도 해 보았다. 하지만 주말 아침 시간을 빼앗아가는 교회는 내게 너무 귀찮은 존재였고 결국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말을 전하는 난감한 역을 어머니께 맡긴 이후 연을 끊었다.
이제 와서 그 때를 떠올려 보면 참 순진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어느 정도 자라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이후로, 나에게 있어 종교의 정의란 누군가에겐 '죽음이라는 공포를 잊을 수 있게 하는 마약', 또 누군가에겐 '자신과 타인을 속이면서 돈을 버는 수단'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인간이란 생물학적 기계 장치는 다른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고장나게 마련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서의 영생이라는 달콤한 이야기에 기꺼이 속는 것이다. 애초에 인간 중심의 사상에서 나온 거니 우리 인간이 뭔가 특별한 존재라도 되는 것 같겠지.
모태신앙이란 것에 대해서. 과연 이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손에 이끌려 의해 교회에 가지 않았으면 이 근거 없는 이론을 여태껏 믿고 있을까. 물론 여러 사례를 볼 때 모태신앙이 있건 없건 믿을 사람은 믿고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이런 인생이 달린 사안은 아이가 자라면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근데 부모는 대체로, 아이가 스스로 원하는 대로 크기보단 부모가 원하는 대로 크기를 바라잖아?
종교 단체의 봉사활동으로 사회가 더 살기 좋아진다고 한다면 글쎄, 종교가 없어도 봉사 단체는 많다. 종교가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특별히 더 도덕적으로 행동하지도 않고, 종교가 없다고 해서 당장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전쟁은 오히려 종교로 인해 더 많이 일어났었고 지금도 어느 곳에선 일어나고 있지. 종교 문제로 가계가 몰락하고 관계가 갈라지는 것을 보면 참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내 주위 사람들의 사례를 들을 때면 특히.
물론 난 종교는 인정하지 않지만 개인이 종교를 가질 자유는 인정하기 때문에(아니 그보단 쓸데없이 싸움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친구들 앞에서는 보통 조용히 있는다. 그냥 종교에 돈과 시간과 인생을 바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혼자 속으로 먹먹한 거지. 대나무숲 대신 여기에 이렇게 중얼댈 수밖에. 아무래도 난 늙어 암에 의해 죽을 것이 확실해 뵌다. 그 순간에도 만들어진 신에게 영생을 구걸하는 일은 없을 테지만.
어쨌든 무신론자와 신앙을 가진 사람의 타협점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아래 사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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