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미셸 글라크루아 탄생 90주년 기념전

juo 2024. 3. 22. 23:55

저번달 회사 내에서 누군가 미셸 들라크루아 기념전 티켓을 나눔한 적이 있다. 시간이 안 돼서 받진 않았지만, 메일에 첨부된 링크를 보니 그림이 예뻐 가 보고 싶어졌다.

두 주 전 인천에 갈 일이 있어 살짝 들렀다 갈 생각이었는데, 입장 줄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고 표는 매진이라 놀랐었다. 한국인들이 이렇게 예술에 관심이 많을 만큼 여유가 넘쳤다고?

그래서 이번엔 예매를 확실히 했다. 전날 새벽까지 마신 결과 쌓인 숙취와 설거지거리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다만 너무 서둘렀는지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시간이 붕 떠 버렸다.

주위에 레트로 카페라는 곳을 가 봤지만 자리가 꽉 차 국전 게임 매장이나 둘러봤다. 돈은 없었지만 가지고 싶은 건 많았던 학생 때와는 다르게 이제 살 만한 것도 흥미가 가는 것도 없다.

일찌감치 전시관에 가서 표를 받고 옆에 보이는 무료 전시관에 들어갔다. 이쪽은 판화를 모아놓은 듯했다. 동화 같은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정규 교육 과정 중 배운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판화 지식밖에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어떻게 이런 그림이 나오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카페에 앉아 있다 시간이 되어 들어갔다. 사람이 정말 많았다. 자유 관람이라 사람이 적은 곳부터 순서 없이 내키는 대로 봤다. 촬영가능한 구역이 정해져 있었고 그곳에선 너도나도 셀카를 찍는다. 그림보단 그림을 보는 자신에 심취한 사람도 물론 있을 수 있지.

그림 한 점 한 점에서 파리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졌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데 정말로 그런 것 같다. 이걸 기억으로 그렸다는 것도 대단하고. 나보고 20년을 넘게 살았던 인천의 주공아파트 단지 풍경을 그리라고 하면 전혀 그릴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탄생 90주년이라니, 일생의 대부분을 그림과 함께 하셨구나.

따뜻한 색감의 그림이 많았는데, 조명 덕인지 도료가 좋아선지 주황색 계열 물감의 발색이 좋게 느껴졌다.

이렇게 붓터치를 보고 있으면 나도 미술학원에서 생각 없이 종료 시간까지 명상하듯 캔버스에 붓질을 하던 때가 그리워진다. 코로나 한창때라 재택근무를 했고 사업부가 끝물이라 일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지금은 회사일과 집안일을 하면 이미 하루가 끝나 다른 하고 싶은 것들은 미루기 일쑤고 주말 약속도 많으니. 아이패드로 낙서는 가끔 하지만(요샌 그마저도 할 짬이 안 난다) 현실의 붓과 물감을 다룰 때만 느껴지는 뭔가가 있다.

내가 개발 일을 평생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경제적 여유가 일을 그만둔 후에도 있다면 그림을 많이 그리고 싶다. 악기도 잘 다루고 싶었지만 몸이 하나인 이상 뭔가는 포기해야 하고 그렇다면 나는 그림 쪽을 고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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