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70

낡은 바디필로우를 떠나보내며

2022. 7. 8. 나는 잘 때 베개가 많은 것을 좋아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보우가 처음으로 등장할 때 아기방의 베개 아래 파묻혀 있었는데, 저런 곳에서 자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래서 옛날부터 머리에 벨 낮은 베개, 껴안거나 아래 깔려 잘 길쭉한 바디필로우, 발 부빌 푹신한 베개, 이렇게 3개를 사용했다. 여태까지 쓰던 바디필로우는 언제 산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 하나데코의 황록색 쿠션이다. 오래 써서 여기저기 헐어 구멍이 났으며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안팎에 묻어 있고 코를 대고 숨을 들이쉬면 냄새도 난다. 후타바 안즈의 토끼 인형이 더 낡으면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예전부터 어머니가 그만 버리라고 했지만 아직까지 대체재를 찾지 못해 자취방에까지 가져와 쓰고 있었다. 이 베..

쓰다 2022.07.18

서울에서의 문화생활

2022. 7. 3. 『탑건: 매버릭』을 보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아이맥스 영화는 서울에선 괜찮은 자리를 잡기가 불가능에 가까운데, 이번엔 시간이 이르긴 하지만 자리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예전에 용산 아이맥스관 A열에서 『듄』을 본 적이 있다. CGV는 양심이 있으면 앞 3개 열은 정가에 판매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걸 보기 위해 어제 전작을 유튜브 뮤비에서 결제해 봤다. 나는 10분 요약이나 줄거리 따위를 찾아보지 않는다. 작품은 작품 그대로를 온전히 즐겨야 작가의 의도에 따른 올바른 감상이라 할 수 있다. 옛날 영화고 스토리도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OST와 그 시대 특유의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젊은 톰 크루즈가 연기한 매버릭을 보니 맑은 눈의 광인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영화관에 조금..

쓰다 2022.07.13

행성이 정렬되고

2022. 6. 25. 이번 행성 정렬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20년 동안 다시 오지 않을 천문 이벤트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수성부터 토성까지의 행성이 황도를 따라 태양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늘어선 데다 천왕성, 해왕성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직선상에 있다. 게다가 오늘내일은 달이 지구 자리에 들어가니 그야말로 완벽하다. 곧 장마철이라 전국적으로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씨가 계속된 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오늘 새벽 동해 쪽이 맑다는 예보가 있어 바로 떠나게 되었다. 예전에 한 번은 유성우를 보겠다고 기상청 예보를 믿고 혼자 차를 빌려 조경철 천문대까지 간 적이 있다. 그 날은 완벽하게 구름이 껴서 결국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만 잔뜩 보고 왔다. 그날처럼 헛수고를 하지 않길 빌면..

쓰다 2022.06.29

뿔밀깍지벌레

2022. 6. 19. 서울 빌딩 숲 한가운데서 제대로 된 공원에 목말라있던 나는 저녁을 먹고 양재 시민의 숲에 가 봤다. 기대를 품고 버스에서 내렸지만 이동하는 데 들인 돈과 수고에 비해선 별로였다. 살면서 내가 상동 호수공원을 그리워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날씨가 좋거나 벚꽃이라도 피면 좀 예뻤을까? 양재천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버드나무를 봤다. 옛날 논바닥이었던 인천 삼산동 인근이 한창 공사 중일 때 아버지가 그곳의 버드나무 잎을 하나 꺾어 피리를 불었던 것이 기억났다. 멈춰서서 버드나무 잎을 살펴보다 한 잎사귀 뒤에 작은 쌀알 같은 것이 10개 정도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어떤 곤충의 알인지 궁금해하며 사진을 찍었다. 집에서 검색을 해 봤지만 내가 본 알의 정보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실망하며 ..

쓰다 2022.06.26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난 고등학교 시절의 덕질

2022. 6. 18. 전에 꾼 꿈도 있고 해서 오랜만에 본가에 왔다. 아버지는 약속이 있어 저녁에는 나가셨고 동생은 항상 그렇듯 주말엔 어딘가로 놀러 나가 없었다. 그래서 저녁에는 어머니랑 둘이 맛조개를 구워 먹었다. 요새 산란기 직전이라 살이 잘 올랐다고 해서 주문해 봤는데 과연 괜찮았다. 딱히 본가에 와도 할 일은 없어 넷플릭스로 그동안 여유가 없어 못 봤던 만화들을 봤다.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중 『어른제국의 역습』, 『태풍을 부르는 장엄한 전설의 전투』를 봤는데 역시 소문대로 애들 만화답지 않게 감동적이었다. 또 뭘 볼까 뒤적거리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 극장판이 이 달 말까지밖에 스트리밍을 안 한다고 하길래 이것도 봤다. 하루히 시리즈는 아마 내가 처음으로 보기 시작한 “오타쿠”스러운 소설..

쓰다 2022.06.21

새벽에 꾼 꿈

2022. 6. 15. 어젯밤 침대에 일찍 누웠으나 더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진작 두꺼운 이불을 빨아 넣고 얇은 이불을 꺼냈어야 했는데 요새 심적으로 지쳐서인지 집안일을 계속 미루게 된다. 에어컨을 틀고 빨리 시원해지라고 중문을 닫아놓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새벽에 이런 꿈을 꿔서 기록해 둔다. 창밖에는 비가 계속 내리고 중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집에는 나 혼자밖에 없는데, 이런 착각을 계속 하다간 내 환각이든 뭐든 정말로 어떤 존재가 생겨날 것 같다. 기왕이면 선물이라도 들고 오는 이로운 존재였으면. 내 옆에 누군가 앉는 무게가 느껴진다. 도둑인가 싶어서 가슴졸이고 있었는데 엄마였다. 엄마가 자고 있는 내 오른손을 잡고 “엄마 왔다”고 속삭인다. 나는 눈은 못 뜨고 “왜 왔어요”라고 두 번 ..

쓰다 2022.06.19

풀빌라 여행이 끝나고

2022. 6. 15. 오랜만에 동네 친구끼리 모여 신나게 놀았다. 개인 사정이 있거나 회사일로 바쁜 친구들은 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7명이면 코로나 이후 최다 인원이다. 어제는 정말 즐거웠다. 야간근무를 한 친구들이 있어서 점심 늦게 모였다. 버기카와 사륜바이크를 타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신나게 달렸다. 처음으로 가 보는 풀빌라 수영장에서 서로의 튜브를 신나게 뒤집고 놀기도 했다. 얼굴이 잠길 때마다 물을 많이 먹고 기침을 했다. 저녁에는 고기를 구워 술과 먹고 보드게임을 했다. J가 가져온 블리츠라는 게임이 정말 웃겨서 나도 사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라 집에서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생각을 접었다. 새벽까지 술을 먹으며 대화를 하다 오늘 아침에 겨우겨우 일어났다. 다른 친구들은 어..

쓰다 2022.06.15

절주

2022. 6. 11. 얼마 전부터 술을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정확히 말하면 혼자서 이유 없이 마시는 건 최대한 자제하기로 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최근 분도푸드 소시지 세트를 주문해 유통기한 내에 소비하려다 보니 곁들여 먹는 맥주 소비량도 늘어나고 있었다. 불현듯 이러다 통풍에 걸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절주를 했을 경우 겸사겸사 뇌세포도 보호하고 돈도 아낄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음식은 어울리는 술과 먹을 때 더 맛있는 법이다. 치킨에는 맥주, 전에는 막걸리, 회에는 증류주. 맥주는 콜라나 탄산수로 어떻게 버텨본다 해도 회는 정말 술 없이는 느끼해서 못 먹을 것 같다. 음식이 아니더라도 오늘 같은 날은 술의 유혹을 참을 수 없다. 정오가 되어 일어나 점심을 먹고 개..

쓰다 2022.06.15

멍게가 되고 싶다

2022. 6. 10. 누군가에겐 꿈인 직장도 막상 안에서 보면 다른 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정에 치이고. 삐걱대며 굴러가고. 과거의 일이 미래에도 나를 괴롭히고. 필요한 지식을 습득할 여유가 모자라 개인 시간에 공부하고. 그 와중에 나만 뒤쳐져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것 같고. 매번 실수하고. 사람들은 어떻게 은퇴할 때까지 이런 일들을 반복해 겪으며 견딜 수 있는 것일까? 어렸을 때 책과 인터넷에서 사람들의 글을 통해 본 개발자라는 직업은 멋져 보였다. 그들은 힘을 합쳐 새로운 것을 배워 무언가를 만들거나 문제를 멋지게 해결한 후 깔끔하게 정리된 글을 써 지식을 공유했다. 하지만 풀어야 할 문제는 복잡하고 그만큼 해결하는 방법 또한 지저분한 데다 완벽한 해결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때론 방대한 요..

쓰다 2022.06.15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 소개팅

2022. 6. 4. 오늘이 그 부모님에 의해 강제로 잡힌 소개팅 날이다. 2022년에도 이런 건 남자가 주도해야 한다는 암묵의 규칙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그 규칙에 동의한 적도 의욕도 없어 힘들었다. 하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상대 여성 분께는 죄가 없으니 최소한의 매너는 지키고 싶었다. 장소는 팬데믹 전에 파판 부대원들과 갔었던 이탈리아 음식점으로 정했다. 음식 맛도 가게 분위기도 적당히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말이라 늦잠을 잘 것을 감안해 시간은 2시로 정했지만 배가 점점 고파오기 시작하자 좀 더 일찍 잡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가게 앞이 공사중이라 조금 시끄러웠다. 상대 분은 약간 ..

쓰다 2022.06.05